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팔 전투 (문단 편집) === 우호 작전 개시 === [[친디트|친디트 부대]]의 공격으로 일본군 후방이 어지러운 가운데 우호작전(ウ号作戰)이 개시되었다. 아무튼 무타구치는 이런 구상을 하달했다. ||1. 제31사단은 남쪽에서 재빨리 국경을 돌파하여 북진, 연합군을 견제하면서 임팔로 향한다.|| ||2. 그동안 제15사단과 제33사단은 기습적으로 친드윈강을 도하, 국경으로 향한다.|| ||3. 견제당하고 있는 연합군의 허를 찔러 제15사단은 직선으로 임팔 동북부에 진출, 연합군을 포위한다.|| ||4. 제31사단은 북진하여 코히마를 점령, 북쪽에서 임팔로 향하는 연합군 증원부대를 저지한다.|| ||5. 코히마의 저지 작전에 성공하면 제 31사단의 일부를 임팔의 주전장으로 돌린다.|| ||6. 이 공략 작전은 20일 이내(!)에 끝내기로 하고 전체의 작전 개시일은 3월 15일로 하되 그 중 제33사단의 행동 개시일은 3월 8일로 한다.|| 지도상으로는 그럴 듯해 보인다. 대정글을 통과해 코히마를 급습하여 영국군의 증원을 차단하고 신속하게 임팔을 공격한다는 계획은 말 그대로 현란한 보병기동을 보여주는 작전으로,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영국은 일본군의 양동작전에 걸려 코히마를 빼앗기고, 임팔까지 포위섬멸당할 위기에 놓였을 것이다. 문제는 맨 윗 문단에서부터 언급했듯 보급과 전력유지였다. 이 임팔 작전의 기한은 병사 개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식량에 맞춰서 작전 기한을 정한 것인데, 당시 병사들에게 분배된 짐은 소총탄 240발, 수류탄 6발, 그리고 20일 간의 식량, 조미료까지 총 40 kg의 [[군장]]을 짊어지고 이 신속한 기동전을 벌여야 했던 것이다. 최소한의 무장만 하고 가도 버거운 기동을 이토록 과중한 짐을 짊어지고 하라는 것은 병사들 입장에서 말 그대로 지옥이 다름 없다. 현대전 들어와서 병참이 작전의 중요 요소를 넘어 작전의 한계나 성패를 좌우하는 수준인데, 현대전에 걸맞게 보급수준에 맞춰서 작전목표를 정하는 것도 아니고 [[미군]]처럼 작전목표에 맞춰서 보급을 해주는 것도 아니라 보급이 안 될 걸 알면서도 작전목표는 무리한 수준으로 정해놓고 알아서 실행하라는 전근대식 개념으로 회귀한 것이다. 옛날 군대는 변수가 워낙 많다보니 요행이라도 기대할 수 있지, 2차 대전 시점에서 그런 게 될 리가 있나. [[일본군]] 내부에서도 보급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결국 조직 전체적으로는 보급이라는 개념이 무시당했으니 몇몇 사람이 말을 꺼낸 정도로 일본군의 멍청함이 덮어지지는 않는다. 당연히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친드윈강을 건너면서 각 사단은 사단이 데리고 있던 보급품 운송용 동물의 약 3분의 1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아라칸 산맥[* 버마와 인도 국경에 있는 산맥으로, 산맥 서쪽에 임팔이 있다. 평균 높이가 2천 m가 넘는 산들이 끝도 없이 있어, 도강에 성공한 일본군은 자동차나 대포를 분해해서 들고 갔다고 한다.]으로 접어들자 병들어 죽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고, 총성이나 포성에 놀라 도망가고 하면서, 동물의 손실 수는 계속 늘어났다. 결국 제31사단의 경우 친드윈 강 도하 이전에는 [[소]] 125마리가 있었지만, 21일 후 코히마에 도착했을 때는 겨우 5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 그 동물들이 죽는 바람에 도착한 개인 탄약의 양은 계획의 절반뿐이었다. 더구나 병사들이 짊어진 무게가 일본인들의 평균 체격 기준으로 벅찬 __40kg__에 육박한지라[* 상황을 따지면 체격 조건이 훨씬 좋은 [[미군]] 특수부대라도 버거운 수준이다. 현재 [[대한민국 육군]]의 동계 FM [[완전군장]]이 약 40 kg 정도 되는데, 40 km 야간[[행군]]을 경험해 본 [[군필자]]들은 알겠지만, 가라로 이것저것 빼고 가볍게 만든 군장을 메고 해도 일반 병사들은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게 급속행군이다. 그런데 이걸 당시 체격도 훨씬 떨어지던 일본의 일반 병사들이, 심지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길도 없는 순수한 야생 정글을 해치고 강 도하까지 해야 했으니, 그냥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정글에 몰래 무거운 장비를 조금씩 버렸는데, 문제는 이 버려진 물건들 중 화력지원을 담당할 산포나 중화기의 부품이나 포탄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 저걸 다 가졌어도 빈약한 화력의 일본군은, 약간이나마 갖고 있던 중화기조차 포기한 꼴이다. 이 임팔 작전에 참가한 3개 사단 중 가장 약체로 평가되는 것은 제15사단이었다. [[태국]]에서 도로건설 작업을 하다가 [[미얀마]]까지 자력으로 행군해 온 데다가 중화기를 비롯한 각종 화기도 부실하여 야포라곤 31식 산포 18문을 보유하고 있는 게 전부였다. 게다가 사단 전체가 작전에 투입된 것이 아니어서 임팔 작전에 나선 사단장이 자기 사단의 병력을 전부 장악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작전 개시 직전에 사단의 중추인 작전주임참모와 보병연대장이 서로 보직을 맞바꾸는 괴상한 인사이동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무타구치의 질타와 독촉에 못 이겨 무리한 돌진을 강행, 3월 28일 임팔의 북면에 가까스로 도달했다. 이는 코히마와 임팔 사이를 차단하고 연합군 보급에 큰 위협을 가하는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